[ Hosi's 유튜브(YouTube) ]/- 후아유TV [인물]

무하마드 알리가 인정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 조 프레이저 통합본 (Joe Frazier History)

호시소라 2022. 11. 27. 19:10
반응형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등과 맞서 싸우며 1960, 70년대 미국사회에서 스스로의 노력과 천재성으로 사회적 편견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프로 복싱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수.

1944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행정의 중심도시인 뷰포트에서 가난한 농가의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조 프레이저의 원래 본명은 조셉 윌리엄 프레이저로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백내장을 앓아 왼쪽 시력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온 그의 가족은 여전히 가난했고, 조 프레이저는 어린나이에 돼지 농장에 나가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망간 돼지를 쫓다가 넘어지면서 왼팔을 다치게 되고,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팔이 일정 각도 이상 펴지지 않는 장애를 갖게 된다.

가난, 장애, 흑인이라는 편견...

배운 것 없고 흑인인 그가 이런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복싱밖에 없었고 프레이저는 망설임없이 글러브를 끼게 된다.

그는 팔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성실함으로 피,땀,눈물을 흘리며 노력을 했고 그 결과, 그의 굳어진 팔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력적인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각도를 만들어주는 무기가 되었다.

그렇게 아마추어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에 도축장에서 일하며 샌드백 대신 저장고에 걸린 고깃덩어리를 치며 훈련을 했다고...

이렇게 힘든 상황속에서도 그는 복싱을 포기하지 않았고 커리어를 계속 쌓아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명으로 평가 받게 된다.

하지만 결승에서 맞붙은 선수 '버스터 마티스'는 프레이저보다 거의 100파운드가 많은 체중인 295파운드의 거구로 3라운드 경기동안 프레이저는 힘과 기술에서 마티스에게 뒤졌고, 결국, 선발전에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신은 프레이저를 버리지 않았는데...
마티스가 훈련 중 부상을 당하게 되고, 이에 후보였던 프레이저가 대표팀에 합류. 극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프레이저는 천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들을 하나 둘 때려눕히면서 순조롭게 준결승까지 올라간다.

준결승 상대는 당시 소련의 강자 '바딤 예멜라노프' 프레이저는 신장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파이팅으로 상대에게 붙어 펀치를 퍼부었고 두번의 다운을 만들어 냈고 결국,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키면서 가볍게 승리하게 된다.

준결승에서 승리를 거두고 링 밖으로 나온 프레이저는 왼쪽 엄지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경기 중 엄지손가락이 골절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결승전 뿐.

프레이저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고, 다친 손가락을 응급처치한 후 결승전에 임하게 된다. 결승전 상대는 독일 올림픽 레슬링 팀에 합류하지 못한 버스 정비사 '한스 후버'

부상의 영향인지 프레이저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프트 훅 사용을 피하는 모습이었고 앞선 경기와는 다르게 힘겹게 3라운드를 버티는 근성을 보인 프레이저는 결국, 3-2라는 근소한 점수차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렇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프레이저는 이 시점에서부터 자신의 인생도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는데...

올림픽 영웅이 되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흑인이라는 굴레속에 차별을 받았고, 자신에게 투자하는 투자자도 없었다.
프레이저는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도축장에 돌아가지만, 시합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도축장에서 마저 해고 당하게 된다.

이렇게 절망에 빠져있는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의 트레이너였던 앙크 드럼이 '클로버레이'라는 지역 사업가 그룹을 모집. 프레이저가 프로로써 풀타임 훈련을 할 수 있는 후원자를 찾은 것이다.

이렇게 또 한번의 기회로 프레이저는 1965년 8월 16일.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182cm라는 헤비급치고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상대와 접근이 이뤄지면 폭발하는 펀치세례로 상대를 쓰러뜨리며 11연속 KO승을 달성. 이에, 사람들은 머리 위로 김을 내뿜으며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에 '스모킹 조'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하지만, 그 해 말 훈련중 사고로 왼쪽 눈이 실명에 가까워질 정도로 나빠지면서 또 다시 위기가 오지만, 조 프레이저는 이러한 신체적 단점을 상체를 크게 흔들어 빠르게 상대에게 접근해 강력한 레프트 훅을 날리는 특유의 복싱 스타일로 보완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6년 9월 세계랭커인 오스카 보나베나를 상대로 경기에 임하는 프레이저. 역시 랭커의 다운 면모를 보여준 오스카 보나베나에게 2라운드에 두차례나 다운을 당하지만, 가까스로 2-1 판정을 얻어 프레이저는 첫 고비를 넘기게 된다.

이렇게 고비를 넘긴 프레이저는 1967년 더그 존스를 6라운드에 조지 차바로를 4라운드에 KO시키면서 메인이벤터로서 발돋움하게 되고 당시, 캐시어스 클레이였던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남 파병 징병거부로 박탈되어 공석이 된 WBC 헤비급 결정전에 나서기 전까지 파죽의 19연승(17KO)라는 무시무시한 전적을 기록하게 된다.

그렇게 챔피언 결정전에 나서게 된 프레이저의 상대는 바로 올림픽 선발전에서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버스터 마티스였다. 복수의 상대를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만나게 된 프레이저는 이를 갈게 되는데...

1985년 3월 4일. WBC 세계헤비급 타이틀 매치.

당시, 34연승(17KO)의 버스터 마티스는 전적으로 봤을 때 프레이저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자신보다 11CM나 더 큰 마티스를 향해 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안으로 파고들어 쉴 새 없이 주먹을 날렸고, 결국, 11라운드 프레이저의 집념은 TKO승을 가져오게 된다.

프로 데뷔 3년만에 아마추어 시절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마티스에게 복수를 이뤄냄과 동시에 세계 헤비급 타이틀까지 거머쥐는 쾌거를 이뤈 조 프레이저.

그의 상승세는 계속되어 3개월 후 미누엘 라모스를 상대로 2라운드 TKO승. 예전 자신에게 애를 먹였던 오스카 보나베나를 상대로 판정승. 데비 지글위츠를 1라운드에 KO시키면서 3차 방어전에 성공.

 

4차방어전에선  제리 쿼리를 만나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데 쿼리의 눈부상으로 경기가 스톱되고 단 18분만에 프레이저의 TKO승이 선언된다. 이 경기는 1969년 링지에 의해 '올해의 경기'로 선정된다.

이렇게 두려울 것이 없었던 조 프레이저는 당시, WBA 챔피언 지미 엘리스와 통합 타이틀 매치를 갖게 되는데...

1970년 2월 16일 벌어진 WBA/WBC 세계헤비급 통합 타이틀 매치.

지금껏 단 한번도 다운을 허용하지 않았던 굳건한 맷집을 자랑하던 지미 엘리스였지만 폭우와도 같은 프레이저의 펀치에 결국, 4라운드에서 두차례 다운을 당하면서 프레이저는 통합 챔피언의 영광을 얻게 된다.

1971년 3월 8일 조 프레이저는 병역거부로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복귀한 무하마드 알리를 상대로 2차 방어전을 갖게 되는데... 당시, 프레이저의 전적은 26연승(23KO) 무하마드 알리는 31연승(25KO)로 둘의 경기는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

인파이터의 프레이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쉴 새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레프트를 내밀며 빠른 발의 아웃복싱을 구사한 알리와의 경기는 용호상박이었으나 라운드가 갈수록 프레이저의 기세에 15라운드. 알리가 다운을 당하면서 승리는 프레이저에게 돌아가게 된다.

무하마드 알리까지 이긴 프레이저에게는 더 이상 적수가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후에 '테리 다니엘스'를 4회에 '론 스텐더'를 5회에 이기는 등 통합타이틀 4차 방어까지 손쉽게 이뤄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프레이저에게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데... 그는 바로 핵주먹 '조지 포먼'이었다.

 

'조지 포먼'
196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프로로 데뷔한 후 무패의 K.O 행진으로 기술보다도 엄청난 위력의 펀치로 상대방을 단번에 다운시키는 슬러거 스타일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벌어진 경기.

당시, 포먼은 20연속 KO승을 포함 37전승(34KO)라는 무지막지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박사들은 4차례의 방어를 성공한데다 무하마드 알리까지 이긴 프레이저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고...

자신의 특기인 상체를 숙이고 돌진하는 인파이팅을 선보이는 프레이저. 하지만 포먼은 우월한 신장과 맷집으로 손쉽게 버텨내며 밀어냈고 프레이저가 상체를 숙이는 타이밍에 자신의 주무기인 강력한 핵주먹을 날리며 5분 26초 동안 프레이저에게서 1라운드 3회, 2라운드 3회 총 6번의 다운을 이끌어내면서 2라운드 2분 26초만에 경기를 끝내면서 챔피언 밸트를 빼았는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 무너진 '조 프레이저' 하지만, 그날로부터 6개월이 지난 7월 2일 '조 버그너'와의 재기전에서 12회 판정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심기일전하며 복귀한 프레이저는 '무하마드 알리'와 논타이틀 경기를 잡고 ABC방송 'Wide World of Sports'라는 프로에 알리와 함께 출연하게 되는데 이 프로에서 둘은 첫번째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프레이저가 자신이 첫번째 경기에서 이겼다고 말하자 알리가 막말을 하면서 프레이저에게 '무식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말을 듣고 격분한 프레이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리에게 '자신이 왜 무식하냐'며 불편함을 보인다.

이에, 알리가 프레이저의 목을 잡고 의자에 앉히려 하자 곧바로 몸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결국, 방송은 중단되고 둘은 모두 벌금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은 서로 앙숙이 되어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나게 된다.

1974년 1월 28일. 

이전 방송에서 알리에게 모욕을 들은 프레이저는 적극적으로 상체를 흔들며 알리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프레이저의 파훼법을 연구한 알리. 

프레이저가 상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빠른 펀치 연타를 날리며 그의 접근을 봉쇄한다. 이에, 프레이저가 어느정도 맞는 것을 각오하고 접근을 강행하자 알리는 클린치를 이용해 공격을 차단. 긴 팔을 이용하여 접근을 견재하는 잽을 계속해서 날리면서 일정 거리를 두고 점수를 따내는 전략으로 대응한다. (2라운드 알리의 공격에 위험해진 프레이저는 종료 공을 착각한 레프리의 간섭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중간 중간 프레이저의 강한 공격이 먹히긴 했지만, 알리의 견제에 계속해서 공격이 막히게 되고 허리를 이용해 상체를 계속 흔들며 한방을 노리는 프레이저의 전술은 체력소모가 심했고 라운드 후반이 되자 눈에 띄게 둔해진 몸놀림으로 알리의 연타를 허용하는 프레이저. 결국, 치고 빠지는 전술로 프레이저의 발을 묶은 알리는 승리를 가져 가게 된다.

아마도 알리는 프레이저의 변하지 않는 공격법에 방송에서 그런말을 했던건 아닐까?

알리에게 진 프레이저는 제리 쿼리와 지미 엘리스를 이기고 1975년 10월 1일. 복수의 칼날을 갈며 무하마드 알리와 북미 타이틀전에서 3차전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알리는 자신을 처참하게 때려눕혔던 조지포먼을 제압하며 '킨샤샤의 기적'을 일으켜 상승세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1라운드부터 기세를 올리는 알리의 레프트 훅에 휘청이는 프레이저. 선제 제압은 알리가 시작한다. 
특유의 빠른 연타로 몸을 숙이고 들어오는 프레이저를 견제하며 점수를 따내는 알리. 허나, 초반과 달리 알리의 연타에 위빙을 크게 하면서 매서운 반격을 가하는 프레이저.

하지만, 알리는 특유의 빠른 발과 로프 기대기를 활용하여 결정타를 내주지 않으면서 6라운드에 프레이저의 마우스 피스가 빠질 정도의 훅을 날리며 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38도라는 무더위속에 벌어진 경기에서 먼저 지친 것은 프레이저였다.

13라운드. 알리의 라이트 훅에 다시 한번 마우스 피스가 날아갈 정도로 제대로 맞은 프레이저의 움직임은 둔해졌고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알리는 계속해서 프레이저의 안면을 공략한다.

14라운드가 되면서 프레이저의 움직임은 확연히 둔해졌지만, 계속해서 알리를 코너에 밀어붙이며 공격을 한다. 하지만, 알리는 수비적이면서도 기회를 노려 계속해서 프레이저의 안면을 공략하고 프레이저는 더욱 더 지쳐 팔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라운드가 끝나고...

트레이너인 '에디푸치'는 프레이저에게 기권을 설득. 프레이저는 이를 거부하지만 에디푸치는 "시합은 끝났어. 모든 사람이 오늘 네가 한 경기를 기억할거야" 라며 타월을 던지고, 15라운드 알리가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과거 사고로 실명에 가까웠던 왼쪽 눈으로 여러 차례 경기를 강행했었던 프레이저는 다른 선수들보다 몇배 체력소모가 심했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알리와의 경기에서 두 눈가가 크게 부풀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 되자 트레이너 '에디 푸치'는 프레이저가 위험하다 판단하고 기권을 결정한 것이다.

승리한 알리 역시 탈진 직전 상태였다는데... 사실 알리도 14라운드가 끝나고 코너에 돌아와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글러브끈을 잘라달라고 했다고 한다. 알리는 "프레이저는 내가 기권하기 바로 전에 먼저 기권을 했다." "프레이저를 때리다 지쳐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라고 힘든 경기였다고 술회했다.

이날의 경기는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이라 불리며 20세기 복싱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파이트로 선정된다.

프레이저는 패배 후, 열패감에 빠지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 데뷔 이후 자신에게서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조지 포먼에게 도전. 그에게 승리하여 열패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랬다.

1976년 06월 15일 

이날 경기장에서 관중들과 아나운서는 크게 놀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프레이저가 머리를 밀고 나온 것 때문이었다.
관중들은 당시, 폭군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평판이 안좋았던 포먼에게는 야유를 비장한 각오로 머리까지 밀고 경기에 임하는 프레이저에게는 승리를 기원하며 엄청난 환호성으로 응원했다.

그렇게 대조적인 분위기에 경기는 시작되고

프레이저는 첫번쨰 대전처럼 무턱대고 포먼에게 접근하지 않고 신중하게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포먼 역시 신중함을 보이면서 경기는 조심스럽게 흘러가는데

하지만 5라운드

포먼이 강력한 레프트훅을 프레이저에게 적중시키면서 둘의 희비는 갈리는데 이 후, 또 한번의 다운으로 프레이저는 5라운드에 TKO패를 당하게 된다. 이 패배 후, 프레이저는 '더 이상 링에 오르지 않겠다' '나는 내 글러브를 우리집 벽에 걸여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안다'며 은퇴를 발표하게 된다.

은퇴 후, 1978년 3월 15일.

프레이저는 남아공 출신 칼리 노즈Kallie Knoetze 와의 시합을 앞두고 복귀를 알렸지만, 간염진단을 받고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 후에 1976년 영화 록키에 카메오로도 출연했었는데...

이에 대한 후일담으로

당시, 촬영을 위해 복싱계 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을 때 프레이저만이 유일하게 초대에 응했고 영화 촬영장에 스스로 찾아와 촬영 준비과정에서 5시간 가까이 자신을 기다리게 한 것에도 개의치 않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이며 카메오로서의 역활을 충실히 다 했다고 한다. 또한, 록키 발보아가 냉동고기를 샌드백 삼아서 때리는 훈련장면은 프레이저의 실제 훈련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970년대 말 Joe Frazier and the Knockouts를 결성하여 음반을 냈으며 미국 전역을 포함하여 아일랜드와 유럽 일대를 돌며 투어 콘서트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1년 12월 3일 다시 링에 오른 조 프레이저.
그는 무명의 '프로이드 커밍스'와 10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더 이상 '스모킨 조'가 아님을 확인했고 결국, 37전 32승(27KO) 4패 1무란 전적을 남기며 16년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게 은퇴 후 자신을 따라 복싱선수가 된 아들 Marvis Frazier와 딸 재퀴 프래지어 라이드Jacqui Frazier-Lyde를 트레이닝 시켰고 아들인 Marvis Frazier는 래리 홈즈에게 도저하지만 패배.


딸 Jackie Frazier-Lyde는 프레이저의 라이벌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의 딸 Laila Ali와의 경기에서 접전을 벌여 근소한 차이로 패하였다.

1989년 무하마드 알리, 조지포먼, 켄 노튼, 래리 홈즈와 함께 특집 기념 Champions Forever에 참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방송에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고,
1996년 자신의 자서전까지 내면서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한 때, 자신의 고향에서 체육관을 운영하였지만, 2009년 건물을 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설도 흘러가는 시간은 이기지 못하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프레이저는 2011년 갑작스레 간암 진단을 받게 되고 몇주 후인 하지만 2011년 11월 8일. 암이 전이가 되어 결국, 프레이저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장례식은 필라델피아 에논 침례교회에서 많은 복싱 전설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고,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와 영화배우 미키 루크는 그에게 조문의 뜻이 담긴 비디오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무하마드 알리는 '세계는 위대한 팸피언을 잃었다. 나는 항상 그를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기억할 것이다' 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그가 떠난 후 5년 뒤인 2016년 6월 3일 그의 곁으로 가게 된다.

지독한 가난과 장애를 가진 불리한 신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성실함과 노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전설적인 선수들과 맞서 싸우며 프로 복싱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수.

그의 전적인 37전 32승 (27KO) 4패 1무에서 패배는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단 2명 뿐.
최고의 위치에서도 항상 겸손했던 조 프레이저는 지금까지 헤비급의 전설로 추앙받는 선수중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10. Order of the Palmetto 수상.
2011. Daily News Front Page Award 수상.
International Boxing Research Organization(IBRO)는 조 프레이저를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헤비급 선수 10명에 선정.
또한 International Boxing Hall of Fame 과 World Boxing Hall of Fame 모두에 헌정되었다.

조 프레이저 (1944. - 2011.11.07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