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3. 22:20ㆍ[ 후아유TV - 인물이야기 (유튜브) ]/- 복싱
한국 프로복싱 제11대 세계 챔피언이자 한국인 최초로 WBC가 선정한 25인의 복서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레전드 선수
1963년 부산 아미동 빈민가에서 태어난 장정구. 좋지 못한 환경속에서 어릴적부터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주먹쓰는 법을 체득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김현치 vs 벤 빌라폴로>의 경기에서 다운이 되고 비틀거려도 끝까지 싸우는 김현치 선수의 모습에 반해 곧바로 어머니께 1500원을 받아 극동 체육관에 입관. 1975년 8월 복싱의 길로 발을 들이게 된다.
6개월 과정을 단 2개월 만에 터득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던 장정구는 1976년 아마추어 복싱에 데뷔하여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 최고선수권 동급에서 준우승을 하며 차세대 복싱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허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1978년 전국체전을 준비하던 중 다른 체육관에서 대회 출전을 두고 이의를 제기. 불우했던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나오지 않았던 장정구의 학력을 문제로 삼았고 결국 전국 체전 고등부 출전을 불허 당하고 만다.
그 후 장정구는 1979년 전국체전 부산 예선 일반부에 출전해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하나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 준결승에서 당시 국가대표였던 장흥민과 붙어 편파 판정으로 탈락하게 된다.
이 후 1980년 5월 전국 아마복싱 대회에 출전했으나 준결승을 앞두고 올림픽 선발전 기록이 들통나 실격당하고 마는데 이에 실망한 장정구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일명 <소매치기출신 복서>로 유명한 김성준의 스파링 파트너가 된 것. 장정구는 김성준을 상대로 주눅들지 않고 신들린 듯 펀치를 휘두르며 놀라운 실력을 보였고 이는 곧 당시 한국 복싱계 대모이자 큰손인 '심영자' 회장 귀에까지 들리게 된다.
이 후 장정구는 전국체전 부산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했으나 부산 복싱협회가 본 대회를 앞두고 대표를 또 다시 '장흥민'으로 교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계속되는 불합리함에 빡친 그는 아마추어를 청산하고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당시 아마전적 <38전 33승(14KO) 5패>
1980년 11월 제10회 MBC 신인왕전을 통해 프로로 데뷔한 장정구는 이전부터 자신을 눈여겨 봐왔던 심영자 회장이 후원회장으로 있는 극동 프로모션에 안착. 데뷔전을 포함해 6연승(2KO)를 거두면서 우승과 함께 우수신인왕에 등극한다.
이 후 1982년 7월까지 18연승(7KO)을 이어가며 거침없이 세계 챔피언을 향해 달리던 장정구는 같은 해 9월 당시 난공불락의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도전하게 된다.
하지만 장신의 사우스포에 유연하면서도 기술까지 좋았던 사파타의 교묘한 복싱을 잡지 못하고 결국 판정패를 당하고 마는데 사실 이 경기에서 장정구는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경기를 준비하던 중 발에 엄지손톱만한 유리조각을 밟는 부상을 당했고 완치까지는 3주 정도의 휴식이 필요했으나
일정이 잡혀버린 경기를 미루는 것은 겨우 1주일 정도가 한계였다. 때문에 장정구는 부상 후유증과 그로 인한 훈련 스케쥴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경기에 임한 것. 하지만 그는 훗날 "18연승 이후 기록한 첫 패배가 없었다면" "15차까지 방어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날의 패배에 큰 의미를 두었다고 회고했다.
이 후 자신이 패배한 경기를 비디오로 돌려보며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 장정구는 6개월 후인 1983년 3월 26일 일라리오 사파타와의 리턴 매치를 갖게 된다. 만반의 준비를 한 장정구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그를 압도했고 3라운드만에 TKO승 따내며 드디어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이날의 승리가 더욱 값진 것은 당시 한국에는 세계 챔피언이 없던 상태였고 타이틀 도전 11연패를 기록하던 중 장정구가 12번째 도전에서 성공했기 때문.
이렇게 챔피언 자리에 오른 장정구는 이 후 거침이 없었는데, 변화무쌍한 빠른 움직임,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주눅들지 않는 투지에 지능적인 경기운영까지 보인 그는 대한민국 복서 중에서도 최상위 클래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그의 진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경기로 헤르만 토레스와의 2차 방어전과 소트 치탈라다와의 3차 방어전,
세계 1위의 지명 도전자 헤르만 토레스를 맞아 2차 방어전에 나선 장정구. 이 경기를 무난히 이긴다면 2,3차례는 임의로 도전자를 골라 방어전을 치룰 수 있었기에 롱런 챔피언을 위한 첫단계로 매우 중요한 시합이었다.
그러나 토레스는 41승(35KO)5패1무의 풍부한 경력과 더불어 돌주먹이라는 닉네임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상대. 하지만 장정구는 1라운드부터 기선을 제압. 변칙복싱으로 토레스의 공격 리듬을 끊었으며 상대의 강타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격렬한 난타전을 벌여 장내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5라운드 버팅으로 감점을 당했지만 10라운드에만 토레스를 두번이나 다운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결국 판정승을 얻어내며 방어전에 성공하게 된다.
이 후 1984년 3월 31일 태국의 도전자 소트 치탈라다를 상대로 벌어진 3차 방어전
장정구가 빠르게 치고 들어가자 이것을 견제하듯 긴 팔로 목을 감싸며 뒤통수를 가격하는 치탈라다. 하지만 장정구는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치탈라다의 안면을 공략한다.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시종일관 경쾌한 움직임을 보이며 경기를 리드하는 장정구.
하지만 6라운드 서로 엉겨붙다 왼쪽 눈자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치탈라다는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돌변. 의도적인지 의욕이 과한 건지 모를 정도로 지나치게 머리를 들이대며 위협을 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구가 물러서지 않자 당황한 치탈라다는 위험할 때마다 팔로 머리를 감싸 누르며 클린치를 시도. 이에 둘이 엉겨붙어 넘어지기까지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렇게 한치의 양보없는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 갑자기 주심이 다리를 절뚝거리는데, 이에 부심이 급하게 경기를 일시중단 시킨다.
이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뭐지?" 하며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주심의 다리에 쥐가 난 것으로 알려졌고 흔히 볼 수 없는 상황에 치열했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해설 - '주심이 나이가 많아 쥐가 난 것 같다'
이 후 시간이 흐를수록 장정구의 얼굴은 피로 물들어갔고 11라운드에 또 한번 경기가 중단되는데 주치의까지 나오며 혹시나 경기가 중단되나 싶었지만 다행히 속행을 결정하는 주심. 하지만 많이 지친 모습을 보이는 장정구는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이는데...
마지막 12라운드
정신력으로 버티는 장정구와 어떻게 해서든 경기를 끝내려고 무리한 공격을 가하는 치탈라다. 관중의 걱정섞인 함성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했고 공소리와 함께 길고 길었던 12라운드가 드디어 끝이 나게 된다.
결과는 장정구의 승리로 3차방어전 성공. 말그대로 처절하게 보여준 혈전으로 복싱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계기가 된 경기였다.
4차 방어전 상대는 일본의 도카시키 가쓰오.
장정구는 이 경기를 앞두고 유독 신경이 날카로웠는데, 체중을 무려 14Kg이나 감량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기 일정이 광복절 3일 후인 8월 18일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3차 방어전 때 자신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고전했던 장정구는 "무더운 더위에 감량과 운동이 너무 싫었지만" "비겁한 챔피언, 나약한 챔피언 이렇게 불릴까 두려웠다"면서 "이 경기에서 지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더욱이 이전 경기로 인해 한·일 전문가들 역시 장정구의 열세를 점치며 냉혹한 평가를 내린 상황.
그렇게 여러 불안속에서 벌어진 경기.
1라운드
공이 울리자 빠른 발을 앞세워 강력한 인파이팅을 전개하는 가쓰오. 하지만 기민한 몸놀림으로 가쓰오의 안면을 정확한 좌우연타로 가격하는 장정구. 이후에도 한치의 물러섬없이 타격전을 이어가는 두 선수였으나 장정구의 라이트훅이 가쓰오의 안면을 강타. 그대로 다운을 얻어내면서 초반 우세를 가져간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면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가쓰오.
3라운드
무리한 감량 때문인지 체력안배에 들어간 장정구와는 달리 가쓰오는 오버페이스가 걱정될 정도로 쉴새없이 주먹을 내지른다. 이러한 공세 속에서도 차분히 대응하며 기회가 생기면 폭풍같은 연타세례로 상대를 주춤하게 만드는 장정구.
그렇게 공방을 이어가며 어느덧 7라운드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상황에서도 한치의 양보없이 주먹을 뻗는 두 선수. 하지만 떨어져 나간 것은 가쓰오였다. 계속해서 펀치를 내지른 그는 장정구의 안면에 롱훅을 헛스윙하며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마는데 확실히 오버페이스에 이은 체력소모가 큰 듯하다.
8라운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친기색이 확연한 두 선수. 결국 다리가 풀리면서 서로 엉켜 넘어지기까지 하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정구의 얼굴은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들었다.
9라운드
공격보단 수비에 치중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이제 펀치를 뻗을 힘도 없는 건가?'하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주먹을 내지르는 장정구. 그렇게 내지른 원투가 가쓰오의 안면에 꼿히면서 주춤하는 순간 이를 놓치지 않은 장정구는 마지막 힘을 짜내 소나기 펀치를 쏟아낸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정신없이 얻어맞는 가쓰오를 본 주심은 결국 경기 종료를 선언. 힘겹게 승리한 장정구는 환호하며 그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후에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경기를 끝내고 울었다" "그런데 너무 땀을 많이 빼서 눈물도 안나오더라"라 말하는 장정구에게서 이번 경기가 그에게 얼마나 부담이 됐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도카시키 가쓰오와의 승부는 화제가 되었고 이에 링지는 승자인 장정구에게 'Korean Hawk'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이 후 6차 방어전에서 롱런의 최대 고비인 숙적 헤르만 토레스의 벽을 어렵게 통과한 장정구는 평균 3개월 간격으로 거침없이 방어전을 치뤘고 어느덧 14차 방어전까지 성공하게 된다.
15차 방어전은 11차 방어전에서 상대했던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와의 2차전.
이날 경기는 장정구의 최초이자 마지막인 해외 원정 방어전으로 일본 고라쿠엔 홀에서 열렸다. 히데유키로부터 우세를 보이며 초반 경기를 순조롭게 이끌어가는 장정구. 이전 1차전에서의 앙금인지 히데유키는 라운드가 끝날때마다 장정구에게 도발을 하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빡친 장정구는 3라운드에 히데유키한테서 무려 3번의 다운을 이끌어내는 놀라움을 보였고 이 후 아예 끝장을 낼 작정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핀치에 몰린 히데유키. 하지만 그의 가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정신없이 공격을 가하느라 고스란히 노출된 장정구의 안면에 히데유키의 카운터가 제대로 꼿히면서 장정구는 비틀거리며 다운 위기를 맞게 된다.
순식간에 역전된 판세.
어떻게 해서든 다운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클린치를 시도하는 장정구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살리려는 히데유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울리면서 장정구는 대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후에도 뚝심있게 서로 펀치를 나누며 난타전을 벌이는 두 선수. 하지만 정확도는 장정구의 펀치가 높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히데유키의 얼굴은 부풀어 올라 피까지 터져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결국 7라운드에 2번, 8라운드에 2번 총 7번의 다운을 따낸 장정구는 TKO 승리를 하며 원정 한.일전을 멋지게 마무리 하면서 대망의 15차 방어전에 성공하게 된다.
장정구는 15차 방어전까지 이뤄내면서 지지리도 못살았던 어린 시절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는데 그의 한 경기 대전료는 7천만원 가량으로 당시 프로야구 선수 최고 연봉이 2천만원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1984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국민학교밖에 안나온 장정구는 전문대 졸업자인 아내에게 경제권을 맡겼으나 이상하리만큼 돈은 모이지 않았고 심지어 있는 돈마저 자신도 모르게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끝내 그녀는 장정구의 모든 재산을 자신과 장모 명의로 돌려놓고 해외로 도망. 이에 그녀를 고소해서 다시 재산을 가져오려 했으나 자식 때문에 포기하고 이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16차 방어전을 준비하는 시기에 가정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장정구는 공황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타이틀마저 반납하게 된다.
허나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숙경씨와 재혼하여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안정을 되찾은 장정구는 1년 6개월의 공백을 깨고 1989년 8월 27일 움베르토 곤잘레스와 복귀전을 치뤄 12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쳤지만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챔피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밀리는 경기 끝에 판정패를 당한 장정구는 이 후 3차방어전 상대였던 소트 치탈라다와의 경기에서 우세를 보였으나
편파적인 판정에 또 다시 패배, 이 후 1991년 무앙차이 키티카셈과의 경기에서는 11라운드까지 무려 4번의 다운을 얻어내면서 우세를 보였으나 체력고갈로 인해 결국 KO패를 당하고 만다.
결국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장정구는 통산전적 42전 38승(17KO) 4패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이 후 코치 생활을 하며 WBA 세계 챔피언 최현미를 발굴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 후 자신의 이름을 건 장정구 복싱 클럽 운영, 가수에 도전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으나 2021년 술에 취한 상태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한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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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86, 87. 3년 연속 WBC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3년 WBC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뽑은 최우수 복서 27인에 선정
2000년 WBC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
(호세 슐레이만 WBC 회장에게 기념패를 받았다)
2010년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한국인 복서 최초 입성.
2014년 WBC 체급별 최우수 복서 선정
가진 것 하나없이 오직 주먹 하나로 위와 같은 수많은 업적을 이뤄내며 한국 프로 복싱의 레전드가 된 장정구. 허나 평생 피땀 흘려 쌓아올린 명성에 한번의 실수로 오점을 남긴 그를 보며 "나 장정구요" 이 한 마디가 과거 영광에 젖어있는 꼰대의 자존심(Pride)이 아닌 아닌 그간 열심히 노력하며 걸어왔던 자신의 인생을 존중하는 자존감(Self-esteem)으로 표현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