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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양아치에서 전설이 된 남자!!

호시소라 2020. 4. 2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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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현대까지 액션영화의 대표 아이콘인 이소룡.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소룡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치스코에서 중국인 아버지 이해천과 중국,독일계 혼혈인 어머니 하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극배우인 아버지에 의해 생후 3개월때 금문녀(Golden Gate Girl)에 나온 것을 계기로 1950년 9살 때 "The Kid"에 출연하면서 아역배우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본명은 이진번으로 이소룡이란 예명은 영화 '세로상'을 찍을 당시 얻은 것으로 제작진 중 한명이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 라는 문구에서 힌트를 얻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역으로 무려 23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쌓게 된 그는 18세에 출연한 '인해고흥'에서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으면서 나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소룡은 7살에 홍콩으로 건너가 태극권을 접하면서 무술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당시, 홍콩은 영국의 통치를 받았던 시기로 영국인들과 중국인들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이는 이소룡의 학창시절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자신을 괴롭히는 영국인 학생들과 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이소룡은 그들과 맞서기 위해 13세에 엽문의 제자로 들어가 영춘권을 배우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영춘권을 배우는 걸 다른 제자들이 반대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순수 중국 혈통이 아닌 혼혈이라 것 때문.

이렇게 이소룡은 동,서양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두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분노는,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은 그를 단지, 동네 양아치로 치부해버리는데 이렇게 어릴적부터 편견 및 인종차별, 식민의식을 느낀 이소룡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을 무술로 선택한 것이었다.

"쿵후를 시작한 건 오직 나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주위에 불량배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지 않았을까?"
- 이소룡

하지만, 잦은 싸움으로 결국, 경찰과 폭력배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그가 18살이 되던 해인 1959년 그의 아버지는 단돈 100달러를 쥐어주고, 이소룡을 미국으로 보내게 된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고등학교를 졸업, 1961년 위싱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 철학, 심리학에 심취하여 그와 관련된 서적을 파고들게 되고 이는 후에 자신의 무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소룡은 미국에서 '린다 C. 에머리'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이소룡이 중국 무술 시범 및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그녀의 고등학교에 가면서 만나게 됐고 그에게 반한 린다는 직접 쿵푸 수업까지 받으러 가기까지 하는 열성을 보였으며
이소룡이 다니는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캠퍼스 커플로 이어지게 된다.

둘의 사랑은 깊어져 결혼을 약속하지만, 린다의 어머니는 당시 학생신분에다 동양계 혼혈인 이소룡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1960년대 당시 미국은 캘리포니아 이외의 지역에선 서로 다른 인종간의 결혼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에 딸이 힘들어 할까봐 더욱 더 둘의 결혼을 반대를 한 것이다. 하지만, 둘은 결국 1964년 8월에 작은 교회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린다가 이렇게 이소룡에게 빠진 이유로는 4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키워진 그녀가 다소 권위주의적인 태도의 이소룡에게서 부성애를 느꼈다는 설이 있다.

허나, 가장 큰 이유는 이소룡의 외모와 스타일이었다고...말끔한 외모에 멋진 몸매, 그리고 그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섹시한 간지가 흘렀다는데 그녀 이외에도 이소룡을 본 사람들은 무술계의 앨비스 프레슬리라 불렀으며, 당시, 서양인들에게 중국 남성에 대한 인식을 개선했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파퀴아오 역시 이소룡을 동경하여 그의 머리스타일을 따라했다고...

이소룡은 20대 초반 시애틀에 자신의 이름을 띤 진번 쿵푸 도장을 열어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이 후, 각종 무대에서 쿵푸 시범을 보였는데, 손가락만으로 푸쉬업을 한다던가, 빠른 몸놀림과 파워를 선보이며 놀라움을 주게 되고, 이에, 각지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그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오게 된다.

그는 과거 자신이 받았던 차별이 싫어 문하생을 받는데에 있어 인종이나 지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며 단지, 무술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그가 제자를 받는 조건이었다.

이에, 그의 도장은 성황을 이뤘고, 시애틀에 이어 오클랜드까지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그의 행보에 중국 보수파는 자신들의 전통 무술을 비중국인에게 전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렇게 서로 의견대립을 하다 결국, 1964년 보수파들은 이소룡의 도장을 닫게 하려 사람을 보내게 된다.

이소룡은 자신의 도장에 비중국인을 못받는 것을 막기위해 보수파에서 보낸 고수와 대결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소룡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대결이 시작된지 단 3분만에 승부가 결정나 버린다. 그렇게 보수파가 돌아가고 이소룡의 측근들은 기뻐하였으나, 그는 고뇌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3분이라는 시간이 무척이나 짧다고 느꼈지만 이소룡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3분이라는 그 시간마저 길었다 생각하면서 자신의 무술이었던 영춘권이 실전 싸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좀 더 간결하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신만의 무술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소룡에게 있어서 무술은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의 수단이었을 뿐 사실 그는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컸었다.

'내 확고한 최고 목표'

'나 이소룡은 미국에서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첫번째 동양인 수퍼스타가 될 것이다.'
'그 보답으로 나는 최고로 흥분되는 퍼포먼스를 선사하고'
'배우로서 최고의 역량을 제공할 것이다.'
'1970년 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을 것이며 1980년까지 천만달러를 소유할 것이다.'
'기쁨과 내적 조화와 행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살 것이다.'

 

-1969년 1월 이소룡

이렇듯 그는 헐리우드에서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1959~1964년까지 부단히 노력해왔으나, 동양인인 그를 주연으로 써주는 제작사는 없었고 결혼까지 한 상황에서 기본 생활마저 힘들어지게 되자 이소룡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무술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무술을 홍보하러 롱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나가 무술 시범을 보였는데 이날의 시범은 그에게 뜻밖에 기회로 다가오게 된다.

이소룡의 무술시범을 본 '제이 시브링'이라는 유명 헤어디자이너가 그를 인상깊게 보게 되고 자신에게 머리를 하러 온 헐리우드 제작자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에게 "롱비치 무술대회에서 놀라운 사람을 봤다."며 이소룡을 추천하게 된다.

이에, 이소룡은 Number One Son의 배역 오디션을 보게 되나, 캐스팅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소룡을 인상깊게 본 윌리엄 도지어는 이 후, 그린 호넷 (The Green Hornet)이라는 TV시리즈의 케이토(Kato, 加藤)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주게 되고 이소룡은 배역을 따내게 된다.

그린 호넷은 1966~1967년까지 방영된 TV드라마로, 악당과 그를 쫓는 탐정의 싸움을 그린 작품이다.이소룡이 맡은 역활은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신비의 인물로 호넷이 위기에 처하면 바람처럼 나타나 무술로 악당을 제압하는 역이었다.

하지만, 그린 호넷의 성적이 그리 좋지 못하면서 이소룡은 이후에 아이언사이드 (Ironside) (1967), 신부들이 온다 (Here Come the Brides) (1969), 블론디(Blondie) (1969) 등에 찬조 출연 정도로 등장. 배우로서 만족스럽지 못한 행보를 걷는다.

후에, 이소룡은 이 역활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말하는데, 조연인것도 있지만, 당시, 열악한 환경과 작은 TV브라운관으로 인해 자신의 무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과 늘 마스크를 쓰고 나온 것에 대한 불만이 컸었다고 한다.

이소룡은 배우로서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무술인으로써는 인기가 상당했는데, 당시, TV로 그의 무술을 본 사람들이 제자가 되겠다고 몰려들게 되고, 이중에는 제임스 가너, 스티브 맥퀸 같은 유명인들도 다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소룡은 시애틀과 오클랜드에 이어 헐리우드에 도장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게 된다.

이 당시, 이소룡은 득점제 무술 경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룰안에서 단지 점수만을 따내는 것은 무술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싸움에 있어 어떠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을 부정하며 어떻게 하면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할까를 생각한다면서 고정적인 형식을 깨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무술을 원한다고 말한다.

이 후, 이소룡은 자신만의 무술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의 무술 및 스포츠를 연구하게 된다. 특히, 펜싱과 복싱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펜싱에서는 상대방이 공격을 하려할 때 선공격으로 상대의 공격을 끊어내는 스킬. 즉,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았고 복싱에서는 타격점을 찌르는 것과 풋워크가 중국무술보다 실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 무하마드 알리, 잭 존슨, 진 터니, 뎀시 등의 경기를 보며 힘을 뽑는 방법, 잽의 중요성 등을 연구하게 된다.

그의 일화 중 하나로 무하마드 알리의 풋워크에 대한 분석을 할 때 오른발 포워더였던 이소룡과는 달리 알리는 왼발 포워더라 이해가 부족하자 알리의 영상을 역방향으로 재생하여 연구하는 열의를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과거에 수상까지 했을 정도로 뛰어난 춤실력을 토대로 차차차의 스텝과 움직임에서도 무술에 적용 하는 등 형식과 권위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도움이 된다고 하면 뭐든지 적용시키는 폭넓은 포용력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소룡은 서양의 기술과 중국무술의 융합에 대해 연구한 끝에 자신만의 무술인 '절권도'를 창시하게 된다.

절권도는 옛 중국 무술처럼 화려하거나 형식적인 것이 아닌, 실전 싸움에서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상대를 끝내는 무술로 그것에는 이소룡의 철학인 단순, 효율, 직선의 개념이 들어있다.

특히, 오랜시간 전해져 고정화가 되어 변화하지 않는 옛 전통 무술과는 달리 자신의 절권도는 매번 새로운 것을 적용시키며
내년 내후년에는 더욱 달라진 절권도가 되길 원했다. 

이는 모든 형태의 표준화와 권위에 대한 경멸이 담겨져 있었고 이를 자신의 절권도에서나마 타파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복싱에서 시작해 K1을 거쳐 종합격투기까지 온 현대 격투기의 변화와 발전을 보았을 때, 1960년대를 살았던 이소룡의 이러한 철학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싶다.

"형식으로 인해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형식들이 법이 되어 사람들은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상적이며 진취적인 생각과 자신을 채찍질하며 무술계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려는 그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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